시간 속의 침묵, 소리로 새겨진 가족의 초상
🟡 서론: 조용한 하루에 스며든 감정의 음표들
2009년 국내 개봉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걸어도 걸어도》가 2025년 5월 21일, 다시 스크린에 걸린다. 긴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가 다시 조명되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전하는 정서적 진실성이 세대를 관통하며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걸어도 걸어도》는 장남의 기일을 맞아 모인 요코야마 가족의 하루를 그린다. 외형적으로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지만, 말하지 않는 감정과, 들리지 않는 마음의 소리가 작은 틈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사운드로 기록한 작품이다. 대사가 아닌, 사운드가 말해주는 영화.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소리를 듣게 된다.
🔊 1. 일상이라는 배경 위에 놓인 소리의 결 현실의 리얼리티를 만든 청각적 리듬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관조적 리듬' 위에 쌓여 있다. 카메라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 편집도 급격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정적인 화면 안에서도 이야기의 결을 만들어주는 건 다름 아닌 소리다.
영화 초반부터 주방에서 들리는 부엌칼의 리듬, 무로에서 들리는 물소리, 유카타가 스치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음악. 이 모든 소리들은 관객을 단숨에 그 ‘집’으로 데려간다. 집이라는 공간이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감정으로 환원되는 순간, 관객은 그 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받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음악을 최소화하고, 대신 인물 간의 사이 소리, 즉 대화 사이의 정적, 숨소리, 식기의 마찰음 등을 통해 현실감을 배가시킨다. 바로 이 부분이, 《걸어도 걸어도》가 단순한 가족 영화가 아닌, ‘살아있는 집’의 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가 되는 이유다.
🧠 2.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감정 침묵의 연출과 사운드의 해석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치는 ‘침묵’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 형제 간의 미묘한 대화에서는 말보다 비언어적 사운드가 감정을 설명한다.
료타가 아버지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 화면에는 둘 사이의 어색함이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설명해주는 건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계 초침 소리’다. 그 똑딱이는 리듬은 대화의 불편함을 은근히 강조하고, 관객에게 ‘이 대화는 서로에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소리로 알려준다.
또한, 대사 중간에 등장하는 짧은 정적. 그것은 단순한 쉼표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감정의 잔향이다.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매미 소리나 먼 거리에서 들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는 마치 감정을 대신해주는 음악처럼 기능한다. 이처럼 《걸어도 걸어도》는 침묵과 소리를 교차시키며 인물의 감정을 정제된 방식으로 전달한다.
🎼 3. 음악이 아닌 음악 일상음과 환경음의 감정화
이 영화의 특징은, ‘OST’라고 할만한 음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건조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일상의 소음이 음악처럼 들리도록 설계된 사운드 디자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점심을 준비하는 도중 들리는 칼도마 소리, 국물이 끓는 가스레인지 위의 작은 진동, 식탁 위 젓가락의 마찰음은 리듬감 있게 배치되어, 음악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특히 어머니가 집안일을 하며 흥얼거리는 오래된 민요 한 소절은 그 자체로 삽입곡 이상의 감정을 전달한다.
사운드 디렉터의 시선에서 보면, 이 영화는 대사를 ‘보완’하기 위한 사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사를 대체하고, 장면을 요약하며, 정서를 유도하는 심리적 음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 결론: ‘소리로 남은 하루’, 그것이 가족의 기억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지만, 사실 그 하루는 감정의 진폭이 가장 큰 날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눈물이 아닌 소리로 흐른다. 그리움, 서운함, 회한, 사랑. 이 모든 감정이 소리로 깃든 공간 안에서 충돌하고 공존한다.
재개봉을 통해 다시 만나는 《걸어도 걸어도》는 단지 ‘좋은 영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가족의 소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귀 기울이면 들릴 것이다. 그날의 숨소리, 식탁 위 숟가락 소리,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의 떨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