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속에서 흐르는 목소리, 사운드로 드러나는 여성의 내면
1. 서론
2025년 개봉한 영화 <사유리(Sayuri)>는 일본계 한국인 여성 사유리가 자신과 주변의 기억, 정체성,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천천히 마주해 나가는 과정을 담아낸 감성 드라마입니다. 화면에는 크게 드러나는 사건이 많지 않지만, 인물의 내면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갈등과 화해를 반복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바로 ‘정적’이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이며, 이를 가능하게 한 중심 요소가 바로 ‘소리’입니다. <사유리>는 음악보다 일상음과 숨소리, 침묵을 더 많이 활용함으로써, 말보다 중요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이 글에서는 음향감독의 시선으로, <사유리>가 어떻게 ‘소리 없는 감정’을 설계하고 관객에게 전달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1. 도쿄와 서울 – 도시의 소음이 감정을 구분 짓다
영화는 사유리가 머무는 두 도시, 도쿄와 서울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각 도시의 음향적 특징이 인물의 감정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쿄의 장면에서는 기차 소리, 자판기 작동음, 거리의 고요한 대화들이 일관되게 배치되며, 사유리의 외로움과 내면의 정적을 배경음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서울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 버스 정류장의 소란스러움, 시장의 소리 등 다양한 생활음이 전면에 등장해 사유리의 불안정하고 복잡한 심리 상태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두 도시의 음향 대비는 인물의 정체성 혼란과 소속감 부재를 ‘공간의 소리’로 설명하며, 관객이 그녀의 심리적 이동을 귀로 따라가도록 만듭니다.
2-2. 침묵과 숨소리 – 말보다 강한 내면의 사운드
<사유리>의 가장 큰 미덕은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도 감정을 들려주는 방식입니다. 사유리가 편지를 읽거나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는 거의 대사가 없지만, 그녀의 심리 상태는 숨소리, 의자에 몸을 맡기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등 아주 미세한 생활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특히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사유리의 호흡 리듬과 환경음이 절묘하게 교차되며, 감정의 고조나 침잠을 극적으로 전달합니다. 때로는 마치 화면 밖에서 관객이 그녀의 속마음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소리를 줄임으로써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키우는 방식을 선택하며, 그것이 오히려 훨씬 강한 울림을 남깁니다.
2-3. 기억의 사운드 –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리의 편집
영화 후반부에서는 사유리의 기억이 과거로 이어지며, 시공간이 섞이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이때 사운드는 시각보다 먼저 전환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장치가 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사유리가 어머니가 쓰던 화장품을 열면, 과거 어머니와 함께 있던 부엌의 소리가 들리며 장면이 전환됩니다. 또는 삐걱대는 문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본가요의 멜로디 등은 감정의 트리거로 작용하며, 시청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과거로 데려갑니다. 이러한 사운드의 시간적 전환은 몽타주보다도 더 유기적이며, 기억이라는 감정의 층위를 사운드로 직조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결론
<사유리(Sayuri)>는 시각보다 청각에 더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그 어떤 대사보다도 강하게 감정을 전달하는 숨소리, 공간의 울림, 정적과 소음의 리듬은 이 작품의 핵심적 정서로 작용합니다. 말보다 소리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 영화는,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기보다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소리로 짜인 이 내면극은, 보는 영화가 아니라 듣는 영화라 부를 수 있으며, 감정의 진폭을 소리로 경험하고 싶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입니다.